구석기시대 집
대전유적은 전남 화순군(和順郡) 남면(南面) 사수리(四洙里) 대전(大田)마을에서
충북대학교박물관에 의해 1987∼89년까지 3차에 걸친 발굴로 중기 구석기
문화층, 후기 구석기문화층, 고인돌문화층이 함께 확인된 복합유적이다.
[복원된 화순 대전 구석기시대 집]
이 유적의 후기 구석기문화층(Va층)에서는 기둥구멍 24개, 강자갈 을 깔아 모를
죽인 네모꼴의 구조물이 있는 긴 타원형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단단한 기초 구조를
갖는 형식으로 기둥 사이의 간격은 1∼2m 정도이며 서로 대칭이 되게 긴 타원형으로
분포하고 있다.
기둥구멍의 깊이는 5∼56㎝까지 있으나, 평균 깊이는 27.4㎝이다.
각 기둥구멍의 지름은 5.5∼28㎝이며 평균 20㎝이다.
집은 지형의 흐름에 따라 남서쪽으로 기울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출입문은 6번과 12번기둥 사이로 이곳에서는 망치, 모룻돌, 격지, 몸돌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화덕은 없고 면적은 약 30㎡(9평)이다. 복원된 집터의 목재는 FRP로 만들었으며, 지붕은 동물가죽 모양의 인조가죽을 사용하였다.
움집
▒. 여수 송도 2호 움집
이 움집은 전남 여수시(麗水市) 돌산읍(突山邑) 송도(松島)에 있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패총유적(貝塚遺蹟)에서 조사된 집자리이다.
1989∼90년 2차에 걸쳐 국립광주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2기의 집자리가 확인되었으며 그중 2호 집자리를 복원해 놓은 것이다.
송도 2호 집자리의 바닥은 패각층(Ⅲ층) 위를 편평하게 고른 뒤
소량의 굴껍질이 썩인 점토를 15∼20㎝가량 깔고 다져 만들었다.
바닥 가운데 화덕(爐址)은 길쭉한 냇돌을 돌려 만들었는데 지름 90∼100㎝ 크기로 원형에 가까운 형태이며안쪽에 재가 채워져 있고 불에 구워져 단단하다.
[복원된 신석기시대 움집]
남서쪽 모서리는 지름 30㎝, 길이 15㎝의 기둥구멍(柱孔)이 발견되었다.
규모는 파괴되어 불확실하나 원형(圓形) 또는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楕圓形)으로 크기는 540㎝이며, 출토유물은 갈돌(石棒), 흑요석제 석기, 숫돌(砥石), 변형덧무늬토기(變形隆起文土器), 민무늬토기 등이다.
▒. 서울 암사동 5·6호 움집
암사동 유적은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岩寺洞) 한강변에 있는 신석기시대 집터 유적이다.
암사동 5호 집자리는 말각방형으로 중앙에 방형(方形)의 화덕이 있고 기둥구멍은 모두 10개로 집터의 네 모서리에 밀집되어 있다. 동남벽 중앙에 출입시설로 생각되는 동남향의 돌출부분이 있는데 집터 바닥면에서 수직에 가깝도록 급하게 53㎝ 올라갔다가 밋밋하게 경사져 오르고 있다. 크기는 장변 550㎝, 단변 485㎝, 깊이 100㎝, 화덕은 55㎝이다.
암사동 6호 집자리는 장방형(長方形)의 수혈(竪穴) 중앙부에 원형의 수혈이 파져있는 2단구조의 특이한 집터이다. 원형의 화덕(爐址)은 자갈과 할석을 사용하여 중앙에 설치되어 있고, 기둥구멍은 외곽수혈 바닥면의 동쪽과 북쪽 모서리에 각 2개, 나머지 두 모서리에 각 1개씩 모두 6개가 나타나 있다. 서남쪽과 북동쪽의 중앙 2곳에 돌출부가 나타나 있는데, 서남쪽의 경우는 3단의 계단형태를 하고 있어 출입구(出入口)로 이용되었고 북동쪽의 돌출부는 저장시설(貯藏施設)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외곽 수혈은 장변 790㎝, 단변 660㎝, 깊이 87㎝, 내부수혈은 직경 490㎝, 깊이 52㎝, 화덕은 0.65×0.60㎝이다. 이들 움집은 서울 암사동에도 복원되어 있는데, 전남지방의 신석기시대 움집과 비교하기 위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 광주 송암동 1호 움집
송암동 집자리는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송암동(松岩洞)에 있는 높이 20∼31m의 나지막한 구릉인 주산에서 1977년 전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집터유적이다. 이 집자리는 풍화된 화강암반을 약 20㎝ 가량 깎고 들어간 직경 4.3m의 거의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이다.
북벽 가까이에 장축 100㎝, 너비 52㎝, 깊이 27㎝의 장타원형에 가까운 타원형 구덩이가 있으며 좌우에 직경 30㎝, 깊이 38∼42㎝의 기둥구멍이 있다. 바닥은 약 5∼10㎝ 정도의 진흙다짐을 하였는데 가운데 기둥구멍과 북쪽벽 사이에는 너비 19㎝, 길이 23㎝의 타원형의 조그만 구덩이가 있다. 기둥구멍은 북쪽에 직경 11㎝와 6㎝, 깊이 12㎝의 2개, 남쪽에 직경 12㎝와 8㎝, 깊이 12㎝되는 2개의 구멍이 있다. 화덕이나 출입시설은 없으며 넓이는 14.86㎡(4.5평)이다.
▒. 순천 대곡리 도롱 2호 움집
주암댐 수몰지구내인 순천시(順天市) 송광면(松光面) 대곡리(大谷里) 도롱마을 북쪽지역에서 1986∼87년 2차에 걸쳐 국립광주박물관에 의해 집자리 72기, 소형유구 27기, 토기요지 1기가 발굴되었다. 그 중에서 1986년에 발굴된 도롱 2호 집자리를 복원해 놓은 것이다.
이 집자리는 평면이 원형으로 내부 중앙에는 길이 130㎝, 너비 62㎝, 깊이 24㎝의 타원형 작업공(作業孔)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 안에는 돌 4개가 박혀 있었다. 규모는 직경 500∼550㎝이고 수혈 깊이는 19∼24㎝이다. 바닥은 사질점토로 별다른 시설은 하지 않았고 기둥구멍은 4개가 있는데 크기와 깊이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기둥구멍의 크기는 직경 35㎝ 내외, 깊이는 20∼30㎝이고 출토유물은 돌화살촉(石鏃), 갈판, 민무늬토기(無文土器) 등이다.
▒. 순천 대곡리 도롱 5호 움집
주암댐 수몰지구내인 순천시 송광면 대곡리 도롱마을
남쪽지역에서는 1987년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집자리 51기, 토기요지 1기, 기타 소형유구 22기가
발굴되었다. 그 중에서 도롱 5호 집자리를 복원해
놓은 것이다.
이 집자리는 발굴지역중 가장 서북쪽에 위치한다.
크기는 장변 400㎝, 단변 300㎝, 깊이 14∼18㎝의
말각방형(抹角方形)으로 장축방향은 북서-남동이다.
남동벽 중앙이 밖으로 돌출되어 있는데 이는
출입시설로 추정된다. 바닥은 다른 흔적이 보이지 않고
기둥구멍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중앙에는 장변 28㎝,
단변 15㎝, 길이 10㎝의 화덕이 있다.
출토유물은 석제가락바퀴(石製紡錘車), 숫돌(砥石), 반달돌칼(半月形石刀), 석검(石劍), 홈자귀(有溝石斧), 돌끌(石鑿), 돌화살촉(石鏃), 돌창(石槍), 기타 다수의 석기 반제품이 일괄출토되어 석기제작소(石器製作所)로 추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십 점의 소형 발형토기(鉢形土器)가 출토된 점으로 보아 공동창고(共同倉庫)의 기능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유구이다.
구석기 시대의 집/움집
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얹힌 신앙대상물로
고대의 소도(蘇塗)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안녕과 수호, 풍농 등을 위해 마을 입구에 세운다.
솟대
순천 우산리 고인돌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내우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1986년 전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 고인돌은 50여기의 상석들이 산기슭에 형성된 평탄한 대지성 구릉에 남북으로 수열을 이루고 있으며, 상석 일부는 반파된 상태였으나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았다. 석실(石室)은 석곽형(石槨形) 39기, 토광형(土壙形) 2기, 위석형(圍石形) 5기, 상석아래에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것 6기, 상석이 없는 석곽형 6기 등 총 58기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모두 석곽형 석실에서만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은 석검(石劍) 17점, 돌화살촉 24점, 삼각형돌칼(三角形石刀) 1점, 돌끌, 홈자귀, 환상석부(環狀石斧),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2점, 곱은옥(曲玉), 대롱옥(管玉), 작은옥(小玉), 토제구슬 등과 민무늬토기(無文土器), 붉은간토기(紅陶), 가지문토기(彩文土器) 등의 토기류가 있는데 그 수량에 있어 부장풍습이 상당히 유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8호에서는 비파형동검 1점, 곱은옥 2점, 작은옥 6점, 53호에서는 대롱옥과 유공유경식석검(有孔有莖式石劍)이 함께 출토되어 특이하다. 이는 비파형동검과 옥이 고인돌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 준 것이라 하겠다. 이전 복원된 것은 53기의 상석중 42기의 상석과 9기의 하부구조이다.
고인돌
[우산리 고인돌 발굴전 전경] [우산리 고인돌 이전 복원후 전경]
화순 복교리 고인돌
화순군 남면 복교리(福矯里) 392-4번지에 위치했던 것으로 1987년 한국교원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한 것이다. 8기의 상석들이 동복천의 흐름과 같은 동남방향으로 1열로 배치되었다. 하부구조가 확인된 것은 6·7·8호이며 나머지는 모두 파괴되었다. 석실은 모두 석곽형이며 냇돌을 사용하여 축조되었다. 출토유물은 돌도끼(石斧), 돌화살촉, 숫돌, 그물추(漁網錘) 등이다. 이전 복원된 것은 8기의 상석 중 6기이다.
순천 신평리 고인돌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新坪里) 금평(琴坪)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1986년 숭실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 한 것이다. 11기의 상석중 하부구조가 남아있는 것은 모두 7기(1-5호, 7·8호)이며, 석실은 냇돌과 할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출토유물은 석검, 돌화살촉, 삼각형돌칼 등이며 구석기 유물도 수습되었다. 이전 복원된 것은 11기의 상석 중 6기이다.
순천 월산리 고인돌
순천시 송광면 월산리(月山里) 반월(半月)마을에 위치했던 것으로 1986년 한양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한 것이다. 10기의 상석 중 하부구조가 남아 있는 것은 모두 8기였다. 출토유물로는 4호주변에서 길이 10.6㎝, 폭 5.6㎝, 두께 3.0㎝의 모자곡옥(母子曲玉)이 있는데, 이 유물은 일본 고분기의 전형적인 유물로 국내에서 발견된예는 드물며 출토위치가 확실한 최초의 유물이다. 이전 복원된 것은 10기의 상석 중 8기의 상석과 1기의 하부구조이다.
순천 곡천 고인돌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곡천(曲川)마을에 위치했던 유적으로 1986년 충북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한 것이다. 이 유적에서는 14기의 고인돌 이외에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구석기 유적이 확인되었다. 고인돌의 석실방향은 유적 앞에 흐르는 송광천과 같은 방향이고 모두 석곽형이며, 특히 1호는 무덤이라기 보다는 제단석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은 석검, 돌화살촉, 돌도끼, 홈자귀, 숫돌 등의 석기류와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구멍뚫린 골아가리 토기편(孔列土器片) 등이 있다. 이전 복원된 것은 14기의 상석 중 6기이다.
보성 죽산리 하죽 다군 고인돌
보성군(寶城郡) 문덕면(文德面) 죽산리(竹山里) 하죽(下竹)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동복천을 따라 4개의 고인돌군이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이중 3개 지역이 1987년에 발굴조사 되었다.
이중 동복천변의 충적평지에 있는 다군 고인돌은 전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본래는 23기의 상석이 남북 3열을 이루고 있었으나 발굴과정에서
소형 상석 17기가 더 확인되어 모두 40기가 분포되어 있음이 확인되었고 발굴된
수는 31기였다.
석실배치는 동복천의 흐름과 같은 남북방향으로 3열을 이루고 있으며, 석곽형과
위석형이 쌍을 이루고 있는 것도 있다.
출토유물은 갈판, 석검, 돌화살촉, 돌칼, 돌도끼, 돌끌, 숫돌, 그물추,
가락바퀴(紡錘車) 등과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등이다.
이 고인돌은 구조면에서 다른 고인돌보다는 대형이고 완전한 형태를 구비하고
있으며, 또 위석형 석실의 존재가 뚜렷이 밝혀져 고인돌 형식이나 그 성격을 [복원된 죽산리하죽 다군 고인돌 전경]
밝혀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보성 하죽리 하죽 가·나군 고인돌
이 고인돌은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하죽에서 1987년에 성균관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서 발굴한 상석 11기를 옮겨 놓은 것이다. 고인돌들은 보성강변의 충적평야에 강줄기와 나란히 열을 지어 분포하고 있었다.
성균관대학교(가군)에서 발굴한 고인돌은 지석이 없는 것으로 석실은 석곽형 7기, 토광형 2기가 확인되었다. 부장품은 석검편 1점이 있다.
경희대학교(나군)에서 발굴한 고인돌중 지석이 있는 것은 1기뿐이었으며 석실은 석곽형 흔적 1기와 토광형 3기만이 확인되었다. 부장품은 석검편 1점이 있다.
순천 우산리 내우산 고인돌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내우산(內牛山) 고인돌공원옆에 있는 유적으로 주암댐수몰지구 발굴조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을 1992년 갈수기를 맞아 주암댐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유적이 노출되자 목포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지표조사시에는 약 4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발굴조사중에 확인된 것은 70여기였다. 그중 발굴은 동편에 있는 42기만을 조사하였다.
발굴결과 군집방향과 장축방향은 일정하지 않으며 42기 중 5기만 하부구조가 파괴되었고, 석실의 구조는 석곽형, 위석형, 토광형으로 보성강유역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석곽형 석실이 주류를 이룬다. 바닥시설을 한 경우는 주로 석곽형 석실에서 보이며 위석형 석실에서는 바닥 전면에 잔자갈이나 냇돌을 깐 경우도 있다.
출토유물은 석검, 삼각형돌칼, 돌끌, 돌화살촉, 숫돌 등과 토기류이다. 이전복원은 상석이 없는 1기의 석실을 제외한 41기를 복원해 놓았는데 하부석실을 완전히 노출시킨 것과 지석과 개석을 노출시킨 것(5호), 원래의 상태대로 복원한 것 등 세 가지 유형이다.
황해도 안악 로암리 고인돌
황해도(黃海道) 안악군(安岳郡) 로암리(路岩里) 제1호 탁자식(北方式) 고인돌을 실물크기의 모형을 만들어서 복원해 놓은 것이다. 이 고인돌은 구릉상에 위치하며 마치 거대한 석조건축물 같이 보인다. 이는 고인돌에 5-6°의 안기울림이 있고 고인돌의 각 부분을 방형(方形) 또는 제형(梯形)으로 정교하게 다듬었으며 웅장하다. 또한 석실 한 모서리에 드나드는 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로암리 고인돌은 두 지석 위에 상석을 올렸는데 상석의 크기는 길이 770cm, 너비 600cm, 두께 64cm이고 무게는 41.5t이며 장축은 남북방향이다. 현재 복원된 모형의 형태는 시각적인 효과를 고려하여 덮개돌의 장축방향을 동서방향으로 변형시켜 놓았다.
야외전시관
선돌
순천 내우 선돌(立石)
주암댐 수몰지구내인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牛山里) 내우(內牛)마을 당산나무 옆에 서 있던 것을 이전 복원해 놓은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괴석"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남성의 성기(男根) 모양을 하고 있어 성 신앙(性信仰)의 한 예이다. 원래는 반구형(半球形)으로 돌무지(積石)를 쌓고 그 위에 두 개가 세워져 있었으나 큰 것은 1986년에 도난당하고 1개만 세워져 있었다.
돌을 쌓은 높이는 250×200×70㎝인데 밑에는 40∼70㎝의 돌을 타원형으로
돌리고 그 위로 30∼50㎝ 정도의 돌을 3∼5단으로 쌓아 반구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 80×21×16㎝ 크기의 장대석 선돌을 세워 놓았다.
내우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에 당산나무에서 당산제(堂山祭)를 지냈는데
이때 선돌에도 금줄을 치고 따로 상을 차려 제사를 지내며 헌식(獻食)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적석(積石)선돌은 조탑(造塔)이라고 하며 순천, 구례, 곡성 등 전남
동부지역에서 많이 보이고 있어 산간 농경지역 마을신앙의 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순천 우산리 내우 돌무지선돌 (立石)]
선돌(立石)은 마을 앞에 세워져 잡귀의 침입을 막는 수호신(守護神) 역할을 하거나, 남근을 상징하는 생산신(生産神)의 기능을 지니며 아울러 풍수지리적인 기능을 지니는 신앙물이다. 또한 선사시대에는 거석문화(巨石文化)의 기능도 지닌다.
[황해도 로암리 고인돌] [황해도 관산리 고인돌]
순천 대치리 5호 고인돌
순천 대치리(大峙里) 고인돌은 황전면 선변-회룡사이의 지방도 확포장 구역에 있었던 유적으로 1990년 전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상석이 있는 7기의 고인돌 이외에 그 주변에서 5기의 석곽이 발견되어 모두 12기가 조사되었다. 석실은 석곽형 석실 11기가 확인되었으나 가장 큰 상석을 가진 고인돌에서는 석실이 확인되지 않았는데 고인돌군을 대표하는 표식 고인돌일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출토유물은 석검, 돌화살촉, 돌끌, 갈돌, 붉은간토기편, 민무늬토기편 등이다.
이 중에서 5호 고인돌을 묘제전시관 좌측에 1/2 크기로 만들어서 전시하였다.
5호 고인돌 상석의 크기는 길이 245㎝, 너비 180㎝, 높이 120㎝이며 윗면에는 5개의 성혈(性穴)이 있다. 장축방향은 서북-동남이며 지석은 5개이다. 석곽은 할석으로 2-3단으로 축조하였고 바닥에는 6매의 판석을 깔았다. 석곽의 크기는 길이 150㎝, 너비 57㎝, 깊이 40㎝이며 장축방향은 상석과 같다.
여수 오림동 5호 고인돌
여수시(麗水市) 오림동(五林洞) 고인돌은 여수 진남체육관이 건축됨에 따라 1989년
전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상석이 있는 9기와 상석이 없는 9기의 석실이 조사되었다. 상석들은
대형의 괴석형이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석실은 할석을 쌓은 석곽형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석관형 석실도 1기가 조사되었다.
출토유물은 비파형동검, 석검편, 돌화살촉, 홈자귀, 돌끌, 대롱옥, 작은옥, 민무늬토기편,
붉은간토기편 등이다.
이 중에서 5호 고인돌의 상석을 내우 고인돌군 아래, 청동기시대 움집이 있는 건너편에 실물
크기로 모형을 만들어서 전시해 놓았다.
상석의 크기는 길이 410㎝, 너비267㎝, 두께 180㎝이며 상석 측면에 새겨진 암각화(巖刻畵)는
석검(石劍)과 인물상(人物像) 등이 새겨져 있으며 검(劍)이 중심을 이루고 인물상이
무언가를 받치거나 기원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여수 오림동 고인돌 암각화]
이러한 암각화는 영일 인비동 등 영남지방에서는 많이 발견되고 있지만 전남지방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고인돌의 장제(葬祭) 추정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 강화군(江華郡) 화점면 부근리(富近里)에 있는 탁자식
고인돌을 실물크기의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은 것이다.
지상으로부터 260cm 높이에 있는 상석의 크기는 길이 710cm, 너비 550cm이며
그 밑에 2매의 지석이 남아 있다. 상석의 장축방향은 남북방향이다.
남한지역에서 발견된 대표적인탁자식 고인돌의 하나로서 사적 제137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
순천 조례동 해룡면 복성리 상비 고인돌
이 고인돌은 순천시 조례동 해룡면 복성리 상비에 있던 것을 순천 국도대체 우회도로(중흥-왕지간)
확 포장공사로 인해 2001년 (재)전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되어 이곳에 옮겨 복원한 것이다.
고인돌은 조사 당시 3개군에서 18기의 덮개돌(上石)이 있었으나, 조사 결과 모두 33기의 무덤방(石室)이 확인되었다. 형식상으로는 상석의 하부에 받침돌(支石)이 없는 개석식(蓋石式)과 받침돌이 있는
기반식(碁盤式)이 혼재된 양상이다.
무덤방(石室)은 깬돌(割石)을 3∼5단 쌓아 만든 돌덧널형(石槨)과 대형 판돌(板石) 1매를 이용하여
만든 돌널형(石棺)이 함께 확인되었다.
껴묻거리(副葬品)는 가지문토기(彩文土器), 간돌검(石劍), 돌화살촉(石鏃), 돌도끼(石斧), 대패날(石鑿), 민무늬토기편(無文土器片) 등이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