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고인돌이란 순수한 우리 나라 말로 큰 바위(돌) 아래를 3∼4개의 돌로 괴여서

받치고 있다고 해서 "고인돌" 이라고 하는데 학술상 고인돌(支石墓)의

일반적인 의미는 지상(地上)이나 지하(地下)의 무덤방(石室) 위에 거대한

덮개돌(上石)을 덮은 선사시대(先史時代) 무덤의 하나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다.

거석문화는 자연석 또는 가공한 돌을 사용한 건조물(建造物)로 고인돌외에

선돌(立石)·열석(列石)·환상열석(環狀列石)·돌널무덤(石棺墓)·돌무지무덤

(積石墓) 등이 있다.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고 있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墓標石), 또는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 의식을 행하는

제단(紀念物)으로 사용되는 것도 있다. 선돌(立石)은 생산(生産)과 풍요(豊饒)의 상징인 남성의 성기신앙(男根信仰)과 관련된 유적, 일출(日出)과 관련된 태양숭배 유적, 제단의 기능, 천문학적인 기능으로 보기도 한다.

                      고인돌의 명칭은 한국(韓國)에서는 지석묘와 함께 사용하며, 일본(日本)에서

                      는 지석묘(支石墓)로 부르고 있다. 중국(中國)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

                      (大石蓋墓)라 하고, 이외 지역에서는 돌멘(Dolmen)이나 거석(巨石, Megalith)

                      으로 부른다. 고인돌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에, 일본에서는 죠오몽(繩文) 만기(晩期)에서 야요이(彌生) 중기(中期)까지,

                      서유럽에서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에서 청동기시대 초기까지, 동남아시아에

                      서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歷史時代)에 이르기까지 거석숭배(巨石崇拜) 사상에

                      서 만들어진 것이다.

일반인들이 고인돌에 대해 부르는 별칭은 자연석이 땅에 묻혀있는 것에서 독배기, 바우배기 등 독바우로, 받침돌(支石)이 있는 남방식(南方式)의 경우 괸바우·암닭바우로, 상석의 형태에 따라 거북바우·두꺼비바우·개구리바우로, 민간신앙과 연관시켜 고인돌의 배치상에서 칠성바우, 옛날 장군이 돌을 옮기다가 말았다는 전설이 많아 장군바우 등으로도 불리운다.

모양및 형태

고인돌의 모양과 형태는 각 지역에 따라 그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이는 각 지역마다 전통과 독자적인 문화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한국 고인돌의 형태 분류는 학자들간에 여러 이견이 많지만 크게 북방식(北方式), 남방식(南方式), 개석식(蓋石式) 등 3종류가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러한 3가지 형식들이 한국 어디에서나 발견되고 있어 북방식은 탁자식(卓子式), 남방식은 기반식(碁盤式-반둑판식), 개석식은 무지석식(無支石式) 또는 변형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매장시설이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남방식, 매장시설이 지상에 있는 것이 북방식으로 쉽게 구분된다.

북방식고인돌

(北方式支石墓)은 잘

다듬어진 판석(板石)

3매 또는 4매로 짜맞춘

석실을 지상에 축조하고

그 위에 편평하고

거대한 판석모양의 돌을

얹어놓아 마치 책상모양

을 하고 있어 이를

탁자식(卓子式)이라고도

부른다. 대형의 북방식은 요동반도(遼東半島)와 한국 대동강유역(大洞江流域)에서만 나타나고 구릉이나 산중턱에 1기씩만 있다. 이외 지역의 북방식은 규모가 작고 석실 폭도 좁고 덮개돌이 두터운 것들이다. 일본(日本)에는 이 형식이 없다. 동남아시아나 지중해 연안에 북방식과 비슷한 고인돌이 있으나 한쪽 단벽에 구멍이 뚫려져 있다. 서유럽의 고인돌은 길죽한 돌 여러 매를 세워 긴네모꼴(長方形)의 석실을 지상에 만들고 그 위에 여러 장의 큰돌로 덮는 것이 특징적이다. 형태상 덮개돌이 1매인 차이는 있지만

인도(印度)와 동남아시아, 중국(中國) 절강성(浙江省), 제주도(濟州道)에서도

보인다.

남방식고인돌(南方式支石墓)은 판석을 세우거나 깬돌(割石)로 쌓은 석실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받침돌을 4∼8개 정도를 놓고 그 위에 커다란

바위같은 돌로 덮어 마치 바둑판모양을 하고 있어 이를 기반식(碁盤式)

이라고도 부른다. 덮개돌이 거대하고 괴석상태를 한 것은 호남과

영남지방에서만 보이고 석실이 없는 것이 많다.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소형의 덮개돌에 받침돌(支石)을 고인 것들이어서 덮개돌이 거대하고 웅장한 형태는 우리 나라 밖에 없다.

 

                                                개석식고인돌(蓋石式支石墓)은 지하에 만든 석실 위에 바로 뚜껑으로 덮개돌

                                                이 놓인 형식으로 요동반도, 한국, 일본 구주지역(九州地域)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이는 받침돌이 없는 남방식으로 분류되며 무지석식(無支石式) 또는 변형

                                                고인돌로 불리운다.

      

                                                고인돌의 무덤방(石室)은 돌널형(石棺形),

                                                돌덧널형(石槨形), 구덩형(土壙形),

                                                독널형(甕棺形)이 있고, 그 평면 형태는

 긴네모꼴(長方形)이 대부분이다. 돌널형과 돌덧널형은 중국, 한국,

일본에서도 보이지만 지역에 따라 약간 다르다. 특히 독널형은 일본

구주지역(九州地域)의 지역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고인돌 하부구조

 




 

 

 

                    석관형                                                   석곽형

자연환경의 조건에 따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선사시대 사람들은 항상

영혼불멸(靈魂不滅)한 자연(自然)의 사물(事物) 즉, 돌에 대한 숭배나

신앙에서 거대한 바위를 이용한 기념물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사람을 살아 있는 시체로 취급하기도 하고, 시체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에서 죽은

사람이 다시 활동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시체를 매장한 뒤 그 위에 큰돌을 덮었을

것이라고 한다. 고인돌의 껴묻거리(副葬品)로 주로 무기(武器)들이 출토되고, 덮개돌

측면에 간돌검(磨製石劍)을 새겨놓은 것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지켜주고 보호해 준다는

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인돌이 분포된 지형은 큰 강이나 하천변의 평지, 구릉상, 산기슭, 고개마루 등으로

사람이 활동하는 주변을 택하였다. 고인돌을 만드는데 있어 무거운 돌을 운반하여야

하기 때문에 덮개돌을 구하기 쉽고, 이동이 용이하고, 사람들이 활동하는 지역이 고려되었다.

 

고인돌의 덮개돌 무게는 보통 10톤 미만이지만 대형의 북방식(北方式)과 남방식은 20∼40톤에 이르며, 초대형 덮개돌은 200톤 이상도 있다. 이러한 고인돌을 축조할 때 가장 어렵고 중요한 작업이 덮개돌의 채석(採石)과

운반(運搬)이다. 덮개돌은 주변 산에 있는 바위나 암벽에서 떼어낸 돌을 이용하고 있다.

암벽에서 덮개돌을 떼어내는 데는 바위틈이나 암석의 결을 이용하였는데, 그 흔적은

덮개돌의 측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구멍자국이 남아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이러한 덮개돌은 동원된 사람들에 의해 고인돌을 축조하려고 하는 장소로 옮겨지게 된다.

실험에 의하면 덮개돌 1톤의 돌을 1마일(1.6km) 옮기는데 16∼20명이 필요하며, 32톤의

큰돌을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옮기는데 2백명이 필요하다는 연구가 있다. 이로 볼 때 한

사람당 100kg의 힘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떼어낸 덮개돌을 운반하는 방법은 여러 개의

둥근 통나무를 엇갈리게 깔고 덮개돌을 옮겨놓아 끈으로 묶어 끈다거나 지렛대를

이용하는 방법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북방식은 지상에 있는 무덤방(石室) 축조에 많은 노력을, 남방식은 거대한 덮개돌을

                                                         이동하는데 어려운 점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운반되어 온 덮개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또는 받침돌(支石)에 흙을 경사지게 돋우고 그 위로 덮개돌을 끌어올린 후 흙을

                                                         제거하였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고인돌의 운반과 축조는 당시 사회에서 거족적(擧族的)인 행사로 치러졌다.




북방식(탁자식)은 석실과 지석에 흙을 경사지게 돋우고 상석을 끌어 올린 후 흙을 제거한다.

축조배경

축조방법

분포

고인돌의 분포는 북유럽, 서유럽, 지중해 연안지역, 인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지역으로 거의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며 바다에 인접된 곳에 밀집되어 있다.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 일본 큐슈 북서부지역, 중국 절강성과 요령성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중국의 고인돌 분포 수는 절강성에 40여기와 요령성에 300여기, 일본은 500여기(50여 곳에 515기), 한국은 공식적인 집계로는 1999년 12월 현재 29,653기로 확인되었으나 북한의 숫자가 정확하지 않지만 비공식적으로는 4만여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표 참조) 분포 수는 한국에 가장 많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유역에 1만여기가 분포된 것으로 추정되며, 남한에 3만여기가 분포하고 있는데 전남지방(全南地方)에 2만여기가 밀집 분포되어 있다. 
이는 유럽 전역에서 선돌 등을 포함한 거석물(巨石物)의 발견 수가 5만 5천여기이나 순수한 고인돌은 수 천기이고, 인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거석물도 수 백기에 불과하다. 
이로 볼 때 고인돌의 중심 분포지는 우리 나라이고 그 중 전남지방이 세계적(世界的)으로 밀집분포(密集分布)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지역별 고인돌 분포수(1999년 12월 현재)

지역별        분포수(기)        비 고           지역별       분포수(기)     비 고

경 기              502            서울포함          전 남       19,058          광주포함

강 원              388                                   충 북        207

경 북              2,800     대구,울산포함      충 남        500              대전포함

경 남              1,238          부산포함          제 주       140

전 북               1,660                                북 한        3,160 (14,000여기 추정)

총 계                   29,653기(40,493여기 추정)

참고자료 : 문화재청·서울대학교박물관 1999,『한국지석묘(고인돌)유적 종합조사· 연구』Ⅰ·Ⅱ.

각 국의 고인돌

              네덜란드 갤러리 무덤(고인돌)             아프리카 이디오피아 하라 고인돌       중국 석봉산 고인돌 

​    일본 사가 마루야마 고인돌                   러시아 고인돌 (서유럽 지역)

기원

고인돌은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라는 문제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출토된 유물의 연대와 형식간의 선·후(先後)관계로 추정하고 있다. 세계의 거석문화는 신석기시대부터 축조되었다고 하나 지역에 따라 그 형태나 시기가 각각 달리 나타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고인돌의 축조시기는 신석기시대 축조설과 청동기시대 축조설 등이 있다. 신석기시대 축조설은 거석문화가 신석기시대부터 만들어졌으며, 씨족(氏族)의 공동무덤(共同墓)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과 고인돌 주변에서 뗀석기(打製石器), 빗살무늬토기편(櫛文土器片) 등이 출토된다는 점을 들고 있다. 청동기시대 설은 기원전 2000년대 말과 1000년대 초와 중기설이 있다. 기원전 2000년대 설은 중국 요령지방의 고인돌 연대와 비교하는 설이며, 기원전 1000년대 초 설은 방사성탄소 연대를 참고하여 우리 나라 청동기문화의 형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것이다. 기원전 1000년대 중기설은 1960년대 초까지 북방식고인돌의 연대로 제시된 설이다. 우리 나라 고인돌의 상한은 기원전 8세기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북한에서는 종전의 기원전 12세기설에서 단군릉 발견 이후 고인돌을 단군조선(檀君朝鮮)과 관련시키기 위해 기원전 24세기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하한연대(下限年代)는 청동기시대 전기 말기설, 후기설, 기원후 설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 말기설은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세형동검문화(細形銅劍文化)보다 앞선 시기인 비파형동검 문화로 보는 것이고, 후기설은 기원전 3∼2세기 또는 서력기원전후로 보는 설로 세형동검 문화시기까지 고인돌이 축조되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세형동검 초기와 관련된 유물이 일부 출토되지만 소위 김해식토기(金海式土器)는 주위에서 발견된 것들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기원후 설은 기원후 1세기와 4세기가 있으나 1960년대 초까지 금석병용기시대(金石倂用期時代) 또는 가야계(伽倻系) 수혈식(竪穴式) 석실과 연결시킨데서 나온 것이다. 우리 나라 고인돌의 하한은 기원전 3∼2세기설이 대체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편이다.

우리 나라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이 간돌검 등의 석기류와 비파형동검과 같은 청동기는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인돌의 중심 연대는 청동기시대라 하겠다.

고인돌의 형식(形式)간 선후관계(先後關係)에 대해서도 북방식설, 남방식설, 개석식설 등이 있다. 중국과 남한 학계(學界)에서는 일반적으로 북방식 고인돌이 선행(先行)한다는 것이 우세한데, 이것은 고인돌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전파되었다는 설과 고인돌의 출토유물중 북방식에서는 석기류(石器類)가, 개석식에서 청동기(靑銅器)가 출토된 점을 들고 있다. 북한에서는 개석식 고인돌이 앞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집단 무덤에서 개별무덤화되는 과정으로 발전했다는 설에 입각한 것이다

 
 
 
 
 
 
 
 
 
 

우리 나라 고인돌의 기원은 크게 자생설(自生說), 남방설(南方說), 북방설(北方說) 등 3가지 설(說)이 있다. 자생기원설은 한반도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했다는 설로 이는 우리 나라에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고, 형식도 다양하며, 주변의 고인돌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설은 고인돌이 우리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세계적인 밀집분포권을 형성하고 있고 또 오랜 기간동안 축조되어, 어느 지역의 고인돌 보다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남방기원설은 동남아시아로부터 해로(海路)를 통해 세골장(洗骨葬)·도작문화(稻作文化)와 함께 중국 동북해안지방과 우리 나라에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 평안·황해·전라도 등 서해안(西海岸)을 따라 고인돌이 집중 분포되어 있고, 남방문화의 요소인 난생설화(卵生說話)와 고인돌의 분포지역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벼농사를 배경으로 한 정착 농경문화와 함께 동남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와 분포상 연결시킬 수 있는 중국 동해안지역 중 절강성만 4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었을 뿐이고, 또 형태상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고인돌의 기원을 그 곳과 관련시키기에 어려움이 있다.

북방기원설은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이 북방의 청동기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요령지방의 돌널무덤(石棺墓)에서 변화 발전하였다는 설이다. 이는 돌방무덤의 뚜껑돌(蓋石)이 1매석으로 대형화되면 무지석식 고인돌이 되고, 다시 지하의 무덤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북방식 고인돌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형태상의 유사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이 있지만 중국 요령지방의 주변지역과 시베리아 등 북방지역에서 서유럽 사이에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지 않아 근거가 희박하다.

이러한 고인돌의 기원은 농경문화(農耕文化), 세골장풍습(洗骨葬風習), 난생설화(卵生說話) 등 남방문화의 요소가 고인돌에서 보이며, 한편 북방문화 요소인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등 청동기문화가 남해안 고인돌의 껴묻거리(副葬品)로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고인돌의 기원을 밝힌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이제까지의 연구로 보면 아시아지역에서 그 중심 분포지가 우리 나라이고, 모양에 있어서도 북쪽에서는 북방식이, 남쪽에서는 남방식이 많으며, 돌널무덤과 유사한 개석식 고인돌이 중국 요령성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우리 나라의고인돌은 남·북방의 문화가 융합된 독자적인 고인돌문화를 형성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크게 석실내(石室內)에 부장된 의례용(儀禮用) 유물과

석실주변에서 발견되는 실생활용(實生活用) 유물이 있다. 의례용 유물들은 무기류(武器類),

공헌토기류(貢獻土器類), 장신구류(裝身具類) 등이며, 가장 많은 것은 무기류인

간돌검(磨製石劍)과 돌화살촉(石鏃)이다. 간돌검은 보통 1점씩 부장시키고 있으나

돌화살촉은 여러 점씩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당시에 희귀하고 특수계층만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는 청동기(靑銅器)는 비파형동검이 많으나 투겁창, 청동도끼(銅斧)와 청동촉(銅鏃)도 있다. 비파형동검은 한반도 남부지역 특히 전남 남해안 지역인 여수반도(麗水半島)에서 많이 출토된다.

 

공헌토기는 붉은간토기(紅陶)와 가지문토기(彩文土器)가 있다.

 

장신구는 천하석제 곱은옥(曲玉)과 벽옥제 대롱옥(管玉)이 있는데

곱은옥은 귀걸이용으로, 대롱옥은 목걸이나 옷을 치장하는데

쓰였다. 실생활용 유물은 사냥용인 돌화살촉, 수확용인 돌칼

(石刀), 공구류(工具類)인 돌도끼(石斧)·돌자귀·돌끌·돌대패날,

이외 그물추(漁網錘), 가락바퀴(紡錘車), 숫돌(砥石), 갈판과

갈돌(石棒) 등 일상생활과 관련이 깊은 다양한 석기들이 깨진

채로 발견된 경우가 많다.

출토유물

축조연대

장법

동북아시아 고인돌에서 사람뼈(人骨)가 종종 출토되나 한국의 토양이 산성을 띠고있는 곳이 많기 때문에 부식되어 인골이 발견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일본 고인돌에서는 머리가 없는 사람뼈나 가슴쪽에 돌화살촉이 박힌 것 등이 발견되고 있다. 
한국 고인돌에서 사람뼈가 나온 예는 충북 제천 황석리, 강원 춘천 중도, 경북 달성 진천동, 경남 진양 대평리, 창원 덕천리 등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람뼈로 보아 하나의 무덤방에 한 사람만 묻은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한쪽 단벽의 개폐(開閉)가 용이한 북방식 고인돌은 무덤방 안을 몇 개의 칸막이로 막은 공간에 사람뼈가 흩어져 있어 여러 사람을 묻은 특수한 예이다. 

서유럽의 경우는 여러 사람을 매장한 공동묘(共同墓)가 대부분이고, 중국 요령성에서는 바로펴묻기(伸展葬)와 굽혀묻기(屈葬)가 많으나 한 석실 안에 여러 명의 시신을 화장(火葬)시킨 예도 있다. 
한국 고인돌에서 출토된 사람뼈로 보면 남자는 신전장을 여자는 측와굴장(側臥屈葬)을 하고 있으며, 나이는 20세에서 30세 초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충북 제천 호아석리 고인골출토 인골 그림

사회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수 많은 인력이 동원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는 북방의 유목사회보다는 정착 농경사회에서 협동하는 사회였다고 본다. 우리 나라의 고인돌 사회는 씨족사회설(氏族社會說), 부계제사회설(父系制社會說), 부족사회설(部族社會說), 족장사회설(族長社會說), 공동체사회설(共同體社會說) 등의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씨족사회나 부계제사회설은 혈연(血緣)을 중심으로 한 집단들의 가족공동묘(家族共同墓)로 고인돌이 축조되었다는 설로 1960년대 이전과 북한지방에서 보는 설이다.

부족사회설은 고인돌이 평등한 공동체 사회로 연장자나 능력있는 지도자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족장사회설은 선사시대 사회발달 과정에서 전문인(專門人)이 출현하여 지역간의 문화전파 및 교역(交易)을 촉진하였으며, 토착농경을 바탕으로 하여 계급(階級)이 발생한 사회였다는 견해이다.

공동체 사회설은 고인돌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개의 군집으로 분포되어 있고 무덤방이 열을 지어 배치되어 혈연집단(血緣集團)의 공동무덤으로 본 견해인데, 고인돌이 수 십기씩 여러 곳에 분포된 것으로 볼 때 일정한 지역 안에서의 각 집단간의 상호 협동체계(協同體系)에 의해 혈연적(血緣的)이거나 지연적(地緣的)으로 뭉쳐진 공동체사회라는 것이다. 이 공동체사회는 집단간의 영토확장을 위해 전투를 통한 통합과 흡수 과정으로 유력한 집단과 지배자(支配者)가 출현하여 소국가(小國家)를 형성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이 사회에서 인접 집단과의 전투 과정에서 전사자의 공헌묘로 고인돌을 축조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역사상의 문헌기록(文獻記錄)과 관련시킨 것으로는 예맥족(濊貊族)과 고조선족(古朝鮮族)이 있다. 모두 청동기문화를 소유한 종족인데, 이 청동기와 고인돌을 같은 문화로 보고 있다. 예맥족은 중국 요하유역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종족으로 비파형동검 등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한 농경사회 집단으로 보고 있는 점이며, 고조선족은 그 특징적인 비파형동검이 대석개묘(大石蓋墓)라는 무지석식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점으로 북한에서는 보는 입장이다.

전남지방 고인돌 특징

전남지방은 우리 나라 서남부(西南部)에 위치해 있으면서, 북으로 노령산맥과 동으로 소백산맥이

가로막고 있고 서와 남은 바다에 접해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영향으로 개방성과 폐쇄성이 함께

나타나는 문화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에 전남지방 고인돌의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전남지방에는 고인돌이 2만여기나 분포하고 있어 세계적인 밀집(密集) 분포상(分布相)을 보인다.

우리 나라에서는 북한의 대동강유역과 더불어 남한과 북한에 각각 밀집되어 있다.

2) 전남지방의 고인돌은 지역에 따라 형태(形態)와 출토유물(出土遺物)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영산강유역(榮山江流域)은 북방식고인돌, 지상석실형(地上石室形)고인돌, 돌널형석실, 주형지석(柱形支石)의 존재, 출토유물의 빈약 등으로 요약되는데, 이는 전북 고창지역과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 그리고 보성강유역(寶城江流域)은 남방식과 개석식고인돌만이 있고, 돌덧널형 석실의 유행, 석검의 부장풍습 성행으로 나타나며, 남해안지역(南海岸地域)은 형태상 보성강유역과 같지만 비파형동검 등 청동기와 관옥·소옥 등 옥류(玉類)의 부장율(副葬率)이 매우 높은 곳이다. 이런 차이점이 있지만 고인돌의 군집상(群集狀)이나 대형(大形) 남방식 고인돌의 존재는 동질적(同質的)인 요소이다. 

3)대형 고인돌의 존재이다. 고인돌들의 상석 규모가 길이 4∼7m, 높이가 2∼4m인 것이 많으며, 그중 화순 춘양 대신리 고인돌은 200톤 이상이나 되는 무게이다. 대형인 경우 50톤 이상의 고인돌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4)부장풍습의 유행이다. 석검, 비파형동검, 옥 등이 부장된 확률이 다른 지역보다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도움되는글>

  • 전남대학교박물관 1985,[주암댐수몰지구지표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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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대학교박물관 1987 ~ 90,[주암댐수몰지역 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 I ~ V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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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희·신상효 1989,[고인돌 이적복원 보고서], 국립광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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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89,[조선유적유물도감]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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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영진 1991,[승주 대치리 지석묘군], 전남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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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문·정기진 1992,[여수 오림동 지석묘],전남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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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문 1993,[전남지방 지석묘 사회의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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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문 1998,[영산강과 지석묘], 국립광주박물관 발표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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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영진 1993,[승주 고인돌공원 조사보고], 전남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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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광준 1979,[우리나라 서북지방 고인돌에 관한 연구], [고고민속론문집]7, 과학백과사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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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칠 1992,[문화재발굴 및 이전복원의 일사례-승주 고인돌공원을 중심으로 -],[전남문화재]제5집,전라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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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구 1992,[강화도 고인돌무덤 조사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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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문 2001,[고인돌이야기], 다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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